학회 일정으로 멕시코시티에 다녀온 후 남미에 관한 영화가 자꾸 보고 싶었다.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영화로 '프리다 칼로'나 '체 게바라'를 다룬 것들이 있었다. 그중에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생각나서 DVD를 빌려두었다가 마침내 짬을 내서 봤다. 내가 아는 '체 게바라'는 티셔츠의 아이콘이나 쿠바 혁명을 주도한 혁명가라는 단편적인 지식뿐이었다. 이 영화는 체 게바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 되었다. 체 게바라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관람 후 그가 왜 혁명가가 되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미국의 사회주의 혁명가 존 리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레즈'와 다른 느낌이다. 레즈처럼 열정적 드라마는 여기엔 없다. 그저 담담한 여행 다큐멘터리와 비슷하다. 중앙역의 감독인 월터 살라스는 과도한 감정을 억제하면서 체 게바라와 알베르토 그라나도가 만난 남아메리카를 솔직하게 그린다.
계급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
중산층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아르네스토(체 게바라)와 알베르토는 이 여행이 그들의 삶을 바꾸리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체 게바라와 알베르토는 계급과 인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을 한다. 체 게바라와 알베르토가 길 위에서 만난 이들은 평소 자신의 계급이나 인종과 다른 이질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본가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민중, 삶의 터전을 잃고 내몰리는 원주민,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하고 외지에 갇혀 지내는 나병 환자들이다. 두 주인공은 이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다른 세계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알베르토의 회고에 따르면, 남미에서 나서 자라났지만 유럽의 역사보다 남미를 더 모르는 자신들이 한심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무지가 자신들의 여행을 계획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남미의 민중들에 공통된 갈등과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체 게바라와 알베르토는 내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영화는 이런 세계관의 변화가 전적으로 여행 때문이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고 있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월터 살라스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체 게바라에 대한 신화를 거들거나 비판하지 않고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가슴 속에 열정이 가득한 치기 어린 젊은이가 안데스 산맥에서 원주민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에서 그려진 체 게바라 일행의 모습은 영웅이 아니라 나약한 젊은이들이었다. 착취하는 자들의 트럭에 돌팔매질이나 하는 하찮은 존재들이다. 평범한 중산층 사내였던 아르네스토는 남미의 고통받는 민중을 만나면서 그의 내면에는 혁명가가 자라고 있었다.
개인적 성장에서 외적 확장으로
이 영화는 혁명가의 삶에 대한 사명 따위를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연출이 아주 완벽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체 게바라 일행이 광산 노동자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 장면이 있다. 자신들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직장을 잃고 이주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 한 명이 체 게바라에게 "당신은 왜 여행을 하죠?"라고 물었다. 체 게바라는 자신은 그냥 여행하기 위해 여행한다고 대답했다. 이 장면은 중산층의 여유 있는 여행과 노동자의 생존을 위한 여행을 선명하게 대비시켜준다. 이 상황에 체 게바라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자신의 성찰을 보여준다.
비슷한 상황이 영화 곳곳에서 연출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체 게바라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별다른 고민 없이 살았던 과거의 자신을 성찰하면 체 게바라는 성장한다. 그가 굳이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체 게바라의 외적 변화를 알 수 있는 장면이 마지막 무렵에 등장한다. 체 게바라가 천식을 앓고 있는 힘든 몸으로 고통을 무릅쓰고 강물을 건넌다. 나환자와 의료봉사단 사이에 놓여있는 강물은 은유적으로 자신과 그들의 나누는 경계다. 체 게바라는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의료봉사단이 있는 곳을 떠나서 나환자가 있는 곳으로 헤엄친다. 그곳에서 나환자들과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무턱대고 나섰다. 마치 자신의 삶에 놓여있는 경계를 넘으려는 듯이. 이 장면은 유일하게 체 게바라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가올 그의 삶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
이 영화가 아무래도 체 게바라의 개인적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짙어서 두 인물 간의 교감이나 갈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알베르토는 약간 철없는 인물로 그려지고, 체 게바라가 중심을 잡아주는 느낌이 강하다. 체 게바라에 대한 회고적 성격이 배어있는 영화라서 그런 약점이 있다. 그 시절 체 게바라나 알베르토가 느꼈을 갈등이 좀 더 드러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두 인물의 묘사에 균형감을 잃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남미에서 체 게바라가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된다.
체 게바라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로 남미의 멋진 풍광을 즐겨보자. 영화 촬영팀은 체 게바라가 거쳐 간 여행길을 세 번이나 꼼꼼히 답사했다. 그래서인지 장면 하나하나가 예술이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의 촬영지 뉴질랜드를 연상시키는 안데스산맥의 멋진 겨울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남미에 이런 멋진 곳이 있을 줄이야.
알베르토와 체 게바라가 남미와 사랑에 빠지는 로드무비다. 전형적인 로드무비는 여행 자체보다 주인공들 사이의 관계가 중심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교감하는 확장된 로드무비다. 이 영화는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인간의 하찮음을 깨닫는 도 닦는 영화가 아니다. 또한 이 영화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서로를 용서하는 휴먼드라마가 아니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피가 철철 흐르는 인간들의 비극을 몸소 느끼는 다큐멘터리이자, 어떤 해결책도 던져주지 않고 냉정한 현실만 기록하는 여행기다.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누비며 여행하다가 문득 혁명을 하게 되었을까? 이 여행은 관광이 아니었다. 남미 민중의 삶으로 파고드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는 과정이었다. 심상치 않은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로 체 게바라가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